한상 잘 차렸습니다
내 아내는 손맛 좋은 장금이, 경기도 파주의 박영란 씨 이야기
경기도 파주, 겨울 들녘에는 하얀 서리가 내려앉고, 들바람이 제법 차다. 그런 풍경 속에 따뜻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한 농가가 있다. 그곳은 바로 오늘의 주인공, 61세의 박영란 씨와 남편 두수 씨의 집이다. 두 사람의 집은 단정하고 소박하지만, 부엌만큼은 바쁘게 살아 숨쉬는 공간이다. 밥 짓는 냄새, 국 끓는 소리, 그리고 웃음이 끊이지 않는 그곳은 말 그대로 한 상의 행복이 깃든 집이다.
남편 두수 씨의 휴대전화에는 아내의 이름 대신 ‘내 아내는 대장금’이라는 문구가 저장되어 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그의 아내는 정말로 그 이름에 걸맞은 손맛의 달인이기 때문이다. 평범한 재료도 그의 손끝에서 살아나고, 집밥에서도 특별한 품격이 느껴진다.
직접 기른 장단콩이 빚어낸 정직한 맛
영란 씨의 요리는 “직접 키운 재료로, 정직하게 만드는 음식”이라는 철학이 담겨 있다. 그녀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재료는 바로 파주 특산물인 장단콩이다. 장단콩은 예부터 콩 본연의 향과 단맛이 뛰어나 두부, 청국장, 된장, 간장 등 각종 장류의 재료로 사랑받아왔다.
그녀는 봄부터 콩밭을 돌보며, 잡초 하나도 허투루 두지 않는다. 가을이 되면 윤기 나는 장단콩을 수확하고, 직접 맷돌에 갈아 두부를 만든다. 이 두부가 오늘의 대표 요리, 두부만두전골의 주재료로 등장한다.
연말 밥상에 오르는 두부만두전골
보통 연말이면 대부분의 집에서는 떡국이나 전골 요리를 준비하지만, 영란 씨의 집에서는 유독 두부만두전골이 빠지지 않는다. 그녀가 직접 빚은 두부를 이용한 손만두와 진한 육수의 조화는 그야말로 ‘밥상 위의 교향곡’이라 할 만하다.
전골 냄비 안에는 두부와 만두, 다양한 채소들이 알맞게 들어가 있다. 팔팔 끓는 육수는 장단콩의 고소한 향을 머금고, 김이 피어오르며 식욕을 자극한다. 한입 떠보면 부드러운 두부와 쫄깃한 만두피가 어우러져 담백하면서도 깊은 감칠맛이 난다. 그녀의 요리에는 인공조미료가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오랜 시간 우려낸 멸치·다시마 국물, 직접 담근 간장 한 숟갈, 그리고 손맛이 곁들여진 조화가 비결이다.
코다리조림과 비지전, 남도 감성의 밥상
영란 씨의 고향은 전라도다. 그곳의 풍미와 정성이 그녀의 밥상에도 깊게 스며 있다. 두부만두전골 외에도 코다리조림, 비지전, 청경채무침, 유채나물, 그리고 김치 세 가지가 상차림을 가득 채운다.
코다리조림은 말린 명태를 사용하지만, 단단하지 않다. 푹 조린 양념 속에서 부드럽게 풀어지는 살결은 감칠맛이 진하고 달큼하다. 여기에 두부를 넣어 조림을 완성하는데, 콩의 풍미가 더해져 특유의 고소한 뒷맛이 남는다.
남은 콩비지는 또 다른 음식으로 변신한다. 보통은 버려지는 비지를 그녀는 전혀 낭비하지 않는다. 비지전을 부쳐 내면, 부드러운 속살과 고소한 겉바속촉 식감이 어우러진다. 이렇듯 한 가지 재료로도 다양한 요리가 이어지는 게 영란 씨 손맛의 비밀이다.
김치에 숨겨진 비법, ‘콩물’의 매직
그녀의 음식 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바로 콩물을 넣은 김치다. 영란 씨는 “콩물이 김치의 깊은 맛을 끌어올려 준다”고 말한다. 실제로 콩물은 발효 과정에서 단백질과 지방이 젖산균의 먹이가 되어 감칠맛을 풍부하게한다.
배추김치뿐 아니라 겨자채, 자색무김치 모두 콩물로 버무려진다. 자세히 보면 국물 색이 미묘하게 뽀얗고 부드럽다. 콩물 덕분에 김치는 덜 시고, 마치 오래 숙성된 듯한 깊은 풍미를 낸다. 이 김치는 밥 한 공기에 그저 한 젓가락만 올려도 충분히 한 끼를 책임진다.
그녀는 “김치는 나눔의 음식”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김장을 하면 동네 어르신들과 이웃에게도 꼭 한 통씩 나눠 준다. 받는 사람들은 “이건 돈으로 살 수 없는 맛”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음식만큼 중요한 ‘멋’의 철학
흥미로운 점은, 박영란 씨에게 ‘맛’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멋’**이라는 사실이다. 남편과 함께 농사를 지을 때도, 그녀는 절대 패션을 포기하지 않는다. 밭일을 하면서도 색감 있는 모자, 통 넓은 장화, 깔끔한 앞치마를 챙긴다. 덕분에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폼생폼사 대장금’이라 부른다.
그녀에게 ‘멋’이란 단순히 외형이 아니다. 음식도 아름다워야 하고, 상 차림의 색감도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철학이다. 밥상을 차릴 때는 채소의 색, 국물의 농도, 그릇의 질감까지 꼼꼼히 살펴본다. 그 세심함은 한 장의 그림처럼 완성된 한 상으로 이어진다.
부부의 일상, 그리고 사랑의 밥상
무엇보다 감동적인 건 이 부부의 서로를 향한 따뜻한 마음이다. 남편 두수 씨는 말한다.
“내가 제일 행복할 때는 밥상 앞에 앉아 아내가 요리하는 걸 볼 때예요. 먹는 것도 좋지만, 아내가 정성껏 밥 짓는 모습이 제겐 가장 큰 복이지요.”
영란 씨는 그 말에 웃으며 대답한다.
“남편이 많이 먹어줄 때 행복해요. 서로가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니까요.”
그들의 밥상에는 화려한 음식이 없어도 따뜻함이 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늘 새로운 마음으로 밥상을 차리고, 서로의 존재에 감사한다. 그래서인지 카메라가 비추는 그들의 식탁 위 공기는 늘 환하고 편안하다.
손맛의 본질, 삶을 담다
박영란 씨의 밥상은 단순히 ‘잘 차린 한 상’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기록이자 사랑의 표현이다. 농부로서 땀 흘려 얻은 재료, 아내로서 정성껏 준비한 한 끼, 그리고 부부가 함께 보내는 따뜻한 시간 모두가 한 그릇에 담겨 있다.
그녀의 요리는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한술 뜰 때마다 진정한 손맛이란 결국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한다. 직접 키운 콩이 두부로, 두부가 전골과 김치로, 다시 냉장고 속 반찬으로 이어지는 순환은 마치 자연의 흐름처럼 유연하고 조화롭다.
<한상 잘 차렸습니다>는 이런 그녀의 삶을 통해 ‘잘 차린 밥상’이란 단지 음식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정성·사랑·멋의 조화라는 걸 다시금 일깨워 준다.
이렇게 보면 ‘내 아내는 손맛 좋은 장금이’ 편은 단순한 요리 소개 프로그램이 아니라, 삶의 미학과 가족 사랑을 담은 다큐멘터리 같은 한 편의 이야기다. 파주의 들판처럼 따뜻하고 풍요로운 부부의 밥상은 오늘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며,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밥상은 사랑으로 차려지고 있나요?”